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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프리뷰&리뷰

발레리나 스토리 #2 : 연재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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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발레리나는 한 번 보면 기억에 남고,
어떤 발레리나는 여러 번 보게 되며,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계속해서 찾아보게 되는 발레리나가 있습니다.

조연재 발레리나는 제게 그런 이름입니다.


몇 차례의 부상으로 인해 승급이 늦어졌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녀를 바라볼 때, 그런 이력은 불필요하게만 느껴집니다. 
관객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무대 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드미솔리스트 시절부터 그녀는 이미 주역을 맡아왔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노력과 역할로 무대에 서 있던 시간들.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저는 가능한 한 그녀가 등장하는 작품을 빠짐없이 보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선택’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워졌습니다.

조연재의 무대에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과장되지 않고,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으며, 장면 하나하나를 자신의 호흡으로 채워 나갑니다.
테크닉은 분명 단단한데,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의 밀도와 서사의 흐름으로 관객을 설득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녀가 춤추는 순간에는 ‘잘한다’는 평가보다 ‘믿고 본다’는 감정이 먼저 떠오릅니다.

인스타를 찾아보면, 그녀의 이름은 늘 조용히 등장합니다.
화제의 중심에 서기보다는, 작품의 중심을 지탱하는 이름. 
무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아래에서 묵묵히 받쳐 주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관객의 자리에서 보면, 그 조용함이야말로 가장 큰 미덕처럼 다가옵니다.
한 장면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한 동작도 감정 없이 흘려보내지 않는 태도. 
그 꾸준함이 쌓여 만들어진 무대는, 결국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최근 제 발레 공연 기록을 돌아보면,
조연재의 이름은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지젤〉, 〈인어공주〉, 〈카멜리아 레이디〉, 〈라 바야데르〉, 〈백조의 호수〉, 〈고집쟁이 딸〉, 〈돈키호테〉 등,


심지어 발레 매니아들이 주로 찾는 〈KNB Movement Series〉에서도 그녀는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마음은 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다시 보게 된 작품이 있습니다.
벌써 5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관람했던 〈이영철 안무, 계절; 봄〉.
당시에는 가야금 연주자 주보라 선생의 협연이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작년에 다시 찾아보며 그 작품에 출연했던 무용수가 바로 연재리나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기억 속의 장면들이 조용히 다시 맞물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어공주〉.
초연 당시에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공연장에 들어갔습니다.
‘발레에서 인어공주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신선함 정도로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년에 다시 본 무대에서, 1막의 그녀는 말 그대로 ‘그냥 인어’였습니다.
기교도, 설명도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인어.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가슴을 시리게 파고드는 내면 연기는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원작이 품고 있는 고독과 선택의 슬픔을, 최근 신작 가운데 가장 온전히 무대 위에 올려놓은 해석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2년만에 솔리스트를 거쳐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이후에도, 그녀의 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무대의 무게감이 아니라, 그 무게를 감당하는 여유였습니다. 
더 깊어졌고, 더 차분해졌고, 더 믿음직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재리나를 두고 ‘최애’라는 말을 쓰는 데에 망설임이 없습니다.
화려해서가 아니라, 꾸준해서.
순간을 장악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쌓아왔기 때문에.

한 발레리나를 오래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성기만이 아니라 과정 전체를 함께 바라본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상을 극복하는 시간도, 기다림의 시간도, 말없이 응원하게 되는 것.

연재리나의 무대를 볼 때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은,
‘오늘도 잘 봤다’가 아니라
‘다음에도 또 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이 글은 조연재라는 발레리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한 사람의 성장을 묵묵히 지켜보는 관객이 되는 경험에 대한 기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름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공연장으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발레를 좋아해 온 시간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고, 저는 조용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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