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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프리뷰&리뷰

발레리나 스토리 #3 : 강미선 리나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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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레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종 국립발레단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무대의 또 다른 축에는, 오랜 시간 자신만의 미학과 호흡을 쌓아온 유니버설발레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미선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강미선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오랜 기간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며
클래식부터 드라마 발레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꾸준히 소화해 온 발레리나입니다.
화려함을 앞세우기보다, 작품의 결을 정확히 이해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무용수.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늘 ‘안정감’과 ‘신뢰’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릅니다.


그녀의 무대는 언제나 단정합니다.
선은 흐트러지지 않고, 감정은 과하지 않으며, 인물의 서사는 차분하게 쌓여 갑니다.
주역으로서의 존재감은 분명하지만, 결코 작품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품이 가장 좋은 균형에 도달하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무용수처럼 느껴집니다.


강미선을 이야기할 때,
결국 인연과 관계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석 발레리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함께 무대에 오를 때,
그녀의 춤은 분명 다른 결을 띱니다.

실제 부부인 두 사람은, 리나리노로 함께 등장하는 작품에서
‘연기하는 남녀’ 이전에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두 존재’로 보입니다.
상대의 중심이 무너질 때 미리 감지하는 손,
호흡이 흐트러질 틈을 주지 않는 시선,
끌어당기거나 과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
그 모든 것이 설명 없이도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이 관계는 드러내려 애쓰지 않기 때문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랑을 보여주려 하기보다, 신뢰가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출발하는 파드되.
그래서 두 사람의 춤은 언제나 과장되지 않고, 대신 깊습니다.
‘함께 오래 춤춰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밀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처음 〈발레 춘향〉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날 두 사람의 파드되에는 기술을 넘어선 어떤 관계의 온도가 있었습니다.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시선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움직임.
끌어당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버티지 않아도 안정되는 호흡.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습니다.


2023년,
강미선의 이름은 세계적인 발레상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와 관련해 언급되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매년 세계 무대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무용수와 안무가에게 수여되는 이 상은,
그녀가 오랜 시간 쌓아온 무대의 신뢰가 단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강미선의 무대는
한 번 보고 감탄으로 끝나는 무대라기보다,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리게 되는 무대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면,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관계의 디테일, 감정의 여백이 보입니다.
이런 무용수는 흔하지 않습니다.

국내의 대형 발레단 작품들을 꾸준히 관람해 온 관객의 입장에서,
강미선의 무대는 늘 하나의 기준처럼 남아 있습니다.
동시에, 이런 무용수가
더 다양한 작품, 더 낯선 인물, 더 깊은 관계의 서사를
어떻게 풀어낼지를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깁니다.

만약 강미선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함께하는 무대를 직접 볼 기회가 있다면,
주저 없이 권하고 싶습니다.
화려한 기교보다,
시간과 신뢰가 어떻게 춤이 되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 주는 페어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글은 강미선이라는 발레리나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무대 위에서 관계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지켜본
한 관객의 기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무대를 마음속에 오래 간직한 채
“아, 이건 꼭 다시 보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발레를 좋아해 온 시간은
충분히 의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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